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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감동과 지혜가 가득한 설교 2 (인자의 날 그리고 자기의 날)

by 성경토크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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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지혜가 가득한 설교 2 (인자의 날 그리고 자기의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삶의 새로운 에너지를 얻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빛이 나는 날이 옵니다. 그날을 자기의 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는 인자의 날이 곧 인류에게 가장 빛이 나는 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표현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은 인자의 날, 자기의 날을 주제로 한 설교를 소개해 봅니다.


[ 본문 ]  눅 17 : 22-31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2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주제는 “인자의 날, 자기의 날” 이런 주제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생일과 같은 자기의 날

       
자기 날이 따로 있습니다!  자기 생일날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이해하겠지요?  
사람은 자기의 날 한 때를 보기 위해서 수년동안 고생도 하고 어려움도 겪고 합니다.  그러면 자기 날이 옵니다. 


굼벵이가 매미가 되기 위해서 오랫동안 몸부림치다가 허물을 벗을 날이 오듯이 자기 날이 옵니다.  
인생이 자기의 날들을 기다리고 찾는데 자기 날이 돌아왔을 때는 꿈틀거리며 일어나 빛을 발해야 됩니다. 
그날은  옆의 사람의 날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날이기 때문에 그에게 행복한 날이 되고 그 사람에게 운(運)이 떨어진 날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운(人運)과 천운(天運)이 닥치는 날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는 인운(人運)이 떨어졌다 하고, 하늘로 볼 때는 천운(天運)이 떨어졌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의 때와 시기

자기의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앉을 때가 있고 설 때가 있고 걸어갈 때가 있고 잠잘 때가 있는 것이 분명치 않느냐.  이와 같이 때가 있노라.  그때에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잘되고 형통된다” 했습니다. (전도서 3장)

여러분이 때에 따라서 살고 있는지 보십시오.  때에 따라서 살고 있습니까?  
자기 때에 자기의 위치에 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각인(各人)에게 전달하는 시간이 각각이기 때문에 옆에 사람은 잘 모릅니다.  자기만 압니다.  
자기 날은 자기만 안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이 천운(天運)을 쏟아부어 역사하시고, 사람을 통해서 인운(人運)을 쏟아부어 잘되고 형통되는 역사로 진행되게 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 것을 여러분들은 작고 크게 경험들을 했을 것입니다.  
아무 때나 잘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 때나 못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있습니다!  
될 때에 잘되고 안될 때는 안되더라!  
때가 진행되는 절차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하나님의 날이 있고 하늘의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자의 날을 맞는 방법

        오늘 본문 말씀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모든 일들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이루어집니까?  인생의 소망하는 일들이나 하나님이 소망하는 일들이 어느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아무 때나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님이 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다 해도 본인이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될 것이고, 또 사람이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셔야 된다.  그것이 천륜의 법칙이다.”
 이 말에 대해 아니라고 특별히 다른 답변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의 때와 시기가 꼭 있으니, 자기의 때와 시기에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사전에 예비하고 모든 것을 갖춰놓고 준비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옆 사람의 때가 왔는데 거기에 치우쳐서 급한 성질만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때를 반드시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주시고, 땅으로부터 자기의 때가 옵니다.  
여러분들, 겪어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가르쳐주고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의도를 여러분들이 먼저 알고서 이 말씀을 듣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그럼 인자(人子)의 날은 언제쯤 됩니까?”하고 묻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인자의 날, 사람들이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지만 못본다.”
“아니, 왜 못 봅니까?  그럼, 어떻게 인자와 더불어 살 수 있습니까?”
“인자의 날은 번갯불이 치는 것같이 지나간다.  번개불에 콩을 구워먹을 정도로 빠른 사람들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자도 자기 날이 있는데 인자가 여기 있다 해도 가지 말고 저기 있다 하여도 가지 말아라.  인자는 그렇게 사람 눈에 띄게 나타나질 않는다.  인자는 사람의 귀에 들리게 나타나질 않는다.”

        
“인자도 자기 날이 있는데 하늘의 번개불이 치듯 오리라.”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해도 인자(人子)는 사람의 귀에 들리게, 사람의 눈에 보이게 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자(人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구세주, 메시아(Messiah)를 말합니다. 곧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렇게 나타나리라.”
그렇게 오기 때문에 인자가 세상에 와도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오는 것은 사전(事前)에 탐지기를 가지고 미리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알게 보내지를 않습니다.  왜?  
모르게 와야 하나님이 역사(役事)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자가 오는 것을 왜 모르는고 하니, 사람들이 인자가 오는 것에 대해서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 말해볼까요?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온다는 소리를 많이 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믿고 따르며 - 타신(他神)도 섬기지 않고 다른 데에 머리를 두르지 않고 - 늘 나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내가 너희에게 가리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30세 되었을 때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실제 예수님은 30년 전에 이미 세상에 왔는데 30년 후에서야 - 예수님께서 나와서 일을 하니까 그때서야 - 이스라엘 민족이 “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다.  저분은 인자(人子)다.”하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유대 종교인들이 아닌 순수한 사람들만 알아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시인하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시인하고 알기 이전, 30년 전에 예수님은 이미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을 보고자 해도 보지를 못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인자는 고난 후에 나타난다.

        인자(人子)가 오기는 오는데 먼저 고난도 받고, 어려움도 치르고, 역경도 치루고 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들도 처음 나타날 때는 역경이 있고 고난도 있으며 눈물겨움도 있고 몸부림도 있습니다.  
어려운 경지를 거치고 넘어오고  또 넘어오다가 때가 되면 자기의 날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사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튿날 아침에 부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흘 아침에 이사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회의원이 한 달 만에 되는 것이 아니고 대통령이 몇 달 고생한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눈물겨운 고통과 고역과 어려움을 겪고 온 사람들입니다.  

인자(人子)도 세상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거쳐야 된다고 오늘의 본문 25절에 말씀했습니다.
        “자기 날이 오기 전에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은 받는다.  시대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을 때까지 고난을 받는데 그 고난이 지나가야 되느니라.”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해 흔히 생각하기를 한 번에 영광으로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세상의 이치와 세상의 모든 법칙과 같이 인자도 고통과 어려움과 쓰디씀과 여러 분야 분야의 말 못 할 고통을 거친 후에야 자기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인자도 그와 같고 여러분들 또한 많은 어려움과 힘든 일과 몸부림, 아픔과 인생의 좌절들... 
이런 것을 거치고 지난 다음에야 자기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통역관이 되어 말씀하는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 후에 자기의 날이 온다.

많은 어려움을 거친 후에야 자기의 날이 오지, 어려움을 거치지 않으면 자기의 날이 오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수고와 애씀과 몸부림이 있은 뒤에 반드시 꽃이 피고 자기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날이 와봤자 그날은 별 특별한 날들이 아닙니다. 
고시 공부를 하여 합격해서 판사가 되고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외교관이 되고, 행정고시에 붙고 외무고시에 붙고 하는 것이 누가 사인을 해 주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대통령이 사인해준다 해서 그것이 됩니까?  
그들이 수년 동안, 다시 말하면 초등학교 때부터  한 20여 년 동안 자기와의 싸움을 거치고 또 거친 다음에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닙니까?  
그 시험도 자기 혼자 본다면 괜찮은데 몇 천명씩 시험을 봐서 어느 때는 1점 2점의 차점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그런 가운데 된다면 기쁘고 기쁜 것입니다.  
하지만 또 허공 치는 생각이 듭니다.
  ‘허! 내가 이렇게 청춘과 정신을 소모하고서 이것을 꼭 해야만 되는가?  되기는 됐는데...’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자포자기에 빠질 정도까지 투자를 한 것입니다.  
합격이 되었어도 또 2년 동안 계속 연수(硏修)를 받고 돌아다녀야 합니다.  
합격이 된 후에는 더 어려운 연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잘못 보이면 안 됩니다.  왜?  한 번 판단 잘못하면 자기가 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날은 어려운 것을 많이 겪은 다음에 나타납니다!  
고시가 어렵다 해서 그걸로 비유를 들었지만 서론에서 인식시켰듯이 자기의 날이 있습니다.  
그때와 시기가 오기 전에 꼭 몸부림이 꼭 필요합니다!

‘나는 아직 몸부림을 안치고 있는데 그러니 내 날도 없겠네?’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여러분들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자기의 날이 오기는 옵니다.  
그러나 와봤자 별 것도 아니지요.  
그런 상태로는 자기 날이 와도 춤을 추며 노래하며 영광스럽게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많은 땀을 흘리고 수고를 많이 한 농가(農家)의 농부나 농촌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만큼 수고했기 때문에 가을에 자기 추수의 날을 크게 기쁨으로 누리게 됩니다.  
또한 인생을 투자하면서 몸부림친 사람들에겐 - 해마다 자기의 날이 오는 것이 아니라 - 그 일평생의 어느 한 기간에 크나큰 이상(理想)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자기가 열심히 해서 자기의 날을 맞이하게 되면 그 영광이 차고 넘쳐서 자기가 실컷 누린 다음 옆의 사람에게도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부지런히 살아라.

그러니까 자기를 위해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부지런히 심어야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부지런히 고생도 함이 마땅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인데 왜 하늘 앞에 와서 푸념하고 어려움을 다 털어놓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얘야, 시집가서 살면서 왜 친정 부모에게 푸념을 한단 말이냐?  왜 내게 푸념을 하느냐?  그건 네가 할 일이여.  네가 시집갔지 내가 시집갔냐?”
자기를 위한 몸부림으로 얻은 영광은 자기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고생도 사서 한다는 말이 있는데 고생이 없으면 고생 끝에 따르는 이상도 없습니다.

반드시 자기의 날이 옵니다.  
그런데 인자도, 구세주도, 선지자도,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날을 맞기 전에 먼저 고통과 고난이 얼마나 크게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컸으면 사람들이 다 버려버리겠습니까?
     
자기 인생관이 서있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끼게 되고 삶의 의욕도 약해집니다.
사람이 돈을 벌 때는 돈을 버는 일이 참 재미있습니다.  
연애하는 사람은 연애를 할 때 그렇게 재미있습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 외에는 다른 것이 안 보입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렇게 공부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  이 좋은 것을 왜 안 하지?’ 그럽니다.  
멋을 부리는 사람들은 ‘왜 이 좋은 멋을 안 부리고 다니지?  
왜 같은 값인데 저 사람은 옷을 저렇게 입고 다니지?  
이런 멋쟁이 옷 좀 입고 다닐 것이지.’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한계(限界)가 있습니다.  

돈을 벌어도 결국엔 지루해집니다.  연애를 해도, 돈을 막 쓰고 다녀도 그것도 싫어집니다.  
구경 좋아하는 사람은 매일 온 세상을 구경하고 돌아다니다가도 결국엔 그 일이 싫어집니다.  
그것을 실증이라고 합니다.
실증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사람이기 때문에 인생의 한계가 바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공부에 싫증이 날 때가 있지요?  이미 겪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예쁘게 가꾸는 것도 싫증이 나지요?
  ‘내가 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매일 닦는 것... 나는 순수하게 하고 싶어’하고서 순수로 돌아가지요?  ‘아, 내가 무슨 옷을 이렇게 쫙 빼입고 돌아다녀?  에이, 순수하게 살자. 동대문 시장에 가서 아무거나 사가지고 거무죽죽하게 걸치고 돌아다니자.’ 이런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생 사는 것도 싫증 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음도 싫증 난다고 합니다.
  ‘어서 나이나 팍 먹어버렸으면 좋겠다.  중후하게 40대, 50대로 확 나이 먹어 버렸으면 좋겠다. 싫증 난다.’ 그럽니다.
여러분들도 겨울에는 여름 돌아오기를 원했지만 막상 여름이 와도 싫증 납니다.  
‘싫증’이라는 철학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아하던 것도 싫증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

그런데 인생 가운데 영원히 싫증 나지 않는 세계가 있다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향해 가는 것은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인생을 싫증나지 않게 사는 길은 여호와께로부터 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날이 된 것입니다.  
천운(天運)을 타고 난 날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온 것도 자기 날에 전도되어서 온 것입니다.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날이 있습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때

인자도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됩니다.  
때가 되어야 합니다. 한때 두때 반때의 기간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 4천 년이 끝나니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신약 2천 년이 끝나니까 재림주가 온다는 것입니다.  
애급 고역 400년이 끝나니까 모세가 나타났습니다.  
신광야에서의 40년의 투쟁이 있으니까 그다음에 가나안 복지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께서 30년 동안 가정에서부터 수도길을 준비하다 보니까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는 자기 날이 되었습니다.

자기 날을 위하여 많은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빰빠라 빰빰”하고  나팔 불며 그냥 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메시아도 하나님의 성경해석을 볼진대 자기 날이 올 때까지는 고통과 고난 속에 파묻혀있다 옵니다.  
그래서 욕도 얻어먹고 나아가서는 각종각색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저거 가까이하지 말아라. 저거 가까이하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상황과 사건을 통해서 버려버립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건축가들이 머릿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 21:42)  
머릿돌이 뭔지 알지요?  가장 머리가 될 수 있는 돌, 기초가 될 수 있는 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머릿돌을 버렸으니 그게  건축가입니까?  건축가라면 전문가가 아닙니까?
건축 전문가가 머릿돌도 모르니 건축가라고 할 수 없지요?  
전문가(專門家)라는 게 딴 게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 근본을 찾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구원의 주춧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주춧돌을 버렸습니다.  
공부도 못했고 배울 것도 없다고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보는 지식과 덕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환경을 보니까 지식과 덕망이 있는 곳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버린 것입니다.  
“쓸모없다. 쓸 것이 없다. 가까이하지 마라. 제발 멀리 해다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람이 되어주라.”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머릿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무지함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증거 합니다!  
그들이 사실상 지도자를 전문으로 찾던 종교인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이 종교의 지도자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자기네들보다 수천 배, 수만 배, 수천만 배 나은 머릿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종교인들이 그렇게 반대하고 고통을 주었지만 결국 신약역사를 멋있게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역사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400년간 땅 속에 묻혔지만 400년 후부터 다시금 파내어 그 역사가 오늘날까지 흘러왔습니다.
“그 역사가 최고다. 그때는 무지해서 몰라줬지만 엄청난 역사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무한대의 역사이다.  온 지구촌을 뒤흔드는 역사이다.”  이렇게 평가하고 좋아하는 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가장 위대한 존재자입니다!  
하나님의 대신자가 그리스도인데 오죽했으면 하나님의 대리역할을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뽑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뽑은 것 같이 아주 순수한 가운데, 아무것도 아닌 위치에서 뽑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을 뽑을 때 환경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뽑힌 장소는 뱃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은 보지 않고 사람만 좋으면 쓰셨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사람을 봅니다.
        
사람은 위대한 자 앞에 가면 위대하게 크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질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다녔기에 그렇게 훌륭하게 된 것입니다.  
보는 것이 있기 때문에 배운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한 번에 자기의 날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푼 한푼 벌어서 1관짜리 금덩어리를 사는 것과 똑같습니다.  
금덩어리를 금방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한푼 한푼 매일매일 벌어서 오늘도 금 한 돈어치, 반돈어치를 사며 큰 덩어리 1관을 만들듯이 매일 수고의 대가(對價)입니다.  
비약은 없습니다!  
줍는 것은 복이 있다 하지만 자기가 그만큼 투자했기 때문에 줍는 것입니다.

청춘을 쓸 줄 알아야 됩니다.  청춘이 얼마나 아깝습니까?  
반드시 뛰는 자가 지치지 않고,  뛰는 자가 인생을 보람 있게 삽니다.  뭐라도 열심히 해야 됩니다.
성실한 사람은 바로 표가 납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금방 표가 납니다.  
꾸준하게, 성실하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턱을 고이고 세상을 살피다가 인생을 가치 있게 성실하게 정말로 수고하며 뜻있게 열심히 살아나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살피다가 눈에 띄면 부르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됩니다.  

 

결론


마지막 결론(結論)의 말씀을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메시아가 오면 금방 내 “빰빠라 빰빠!”하며 천국이 금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이 “열렸네 열렸네 지상천이 열렸네. 들어와 들어와 기다린 천년동안 혼인잔치는 오늘에야 시작됐구나 올라가세 올라가세 구름을 타고 천만 성도 함께 모여 노래를 하며....” 이렇게 시작된다고 생각하는데 노래부터도 틀렸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천국은 겨자씨를 뿌려서 잎이 나고 줄기가 나오고 무성하게 크는 것과 같습니다.  
왕창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역사가 없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이미 심판 때가 되었어도 몰랐다.” (눅 17:26-27)
얼마나 한심스러운 역사입니까?  
예수님이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롯의 때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이미 소돔땅을 심판하겠다고 결정했어도 그걸 모르고 먹고 마시고 자고 시집가는 사람은 시집 하고, 아주 태연스럽게 노래하는 사람 노래 부르고 그렇게 살았다.” (눅 17:28-29)
그와 같이 메시아가 영원히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심판하러 왔어도 사람들이 시집하고 장가가고 태연하게 자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와서 얼마나 웃겠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시대를 깨닫도록 하라!


< 기 도 >
        거룩하시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한 대로 자기 날을 멋있게 뜻있게 만들어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날을 위해서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며 역사의 날을 만드셨습니다.  구약 4천 년의 그 피눈물 나는 역사와 신약의 억울한 역사에서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리며 하나님도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고대하셨습니다.  그 역사 앞에 서게 해 주시옵소서.  그 역사의 주인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온 민족이 그렇게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믿고 우주의 근본자를 믿으며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자들에게 그러한 정신과 사상이 크며 그 진리와 더불어 이 시대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더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형통과 이상을 주시고 온전함을 더해 주시옵소서.  자기 날에 크고 성장할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을 감당하기를 원합니다.  반드시 자기 날에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애굽의 고통으로부터 이끌어낸다고 하셨습니다.  심령적인 문제, 고통과 실의(失意)와 희망과 소망이 없는 것들을 다 없애며 오직 온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섬기고 근본으로 할 때 물질적인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사랑의 희로애락과, 예술의 희노애락과, 그리고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같이 꽃 피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되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감사하며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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