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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감동과 지혜가 가득한 설교 1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by 성경토크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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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지혜가 가득한 설교 1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를 들으면 우리의 영혼이 힘을 얻고 문제가 해결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오늘은 불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주제의 말씀을 통해 감동과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 본 문 ]   요 3 : 5-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오늘은 요한복음의 말씀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설교 대목 중 하나입니다.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통해 이 시대를 이해하라.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에 대한 얘기가 큰 사건으로 나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특별한 하나의  대상만을 붙잡고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에게 향한 말씀 역시 온 시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하나에게 지적한 얘기일지라도 그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말고 온 인류를 향해 말씀한 것임을 알라고 늘 말씀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꼭 읽어봐야 됩니다.  
성경을 안 읽고 설교를 들으면 아무래도 깨달음이 늦고, 듣는 것도 아둔합니다.  
많이 읽을수록 문제가 많이 부딪치는 법입니다.  
한 번 읽은 사람은 문제도 없는데 문제를 풀어준다고 설치면 울리는 꽹과리가 될 것 아닙니까?  
성경을 많이 읽음으로 더 깊은 것을 깨달을 수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애간장타지 않는데 말씀을 외치면 그 사람에게는 얼마나 듣기 싫은 이야기이고 얼마나 심정이 안 맞는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요한복음 3장에는 니고데모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주님은 니고데모를 그 시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보고서 말씀을 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처지에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한 번은  예수님의 복음 가운데 찾아와서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 중에 선생인 줄을 믿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들은 정말로 표적적인 일들이고 정말로 이적적인 일들입니다.”  이런 얘기를 고(告)했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는 못 봤을지라도 보통사람으로 안 보고 상당히 큰 자로 보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훌륭한 사람으로 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볼진대 내 말을 들을 것이 아니냐?  나를 그렇게 보니 내 말을 듣겠네!’ 하고서 “사람이 거듭나야 된다!  만일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커녕 보지도 못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가치있는 얘기를 해 줬습니까?  
인생의 가장 값있는 얘기를 직설적으로 해 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장 큰 보화의 말씀을 해 준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온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다” 하고 얘기를 한 것은 사마리아 여인에 해당하는 만큼 해준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하고 니고데모하고 주님 앞에 부닥친 건 똑같은데 다만 니고데모는 이론적으로 많이 가르쳐 줬고, 사마리아 여인은 그만큼 가까이 믿었기 때문에 섬세하게 직설적으로 얘기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직접 그 자리에서 믿고 따를 수 있는 여건을 주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여러 많은 종류의 사람이 만났는데 어떻게 보고 만났냐에 따라서 예수님이 자기에 대한 대접을 해주셨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대접(待接)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을 해주고 상대의 인상을 봐가면서, 상대의 심정을 봐가면서, 행동을 봐가면서 대접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서 충분히 알려면 그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입장과, 그 사람의 친구가 되든지, 애인이 되든지 여하튼 일체가 되면 그만큼 대해줍니다.

   예수님께선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된다는 새롭고 혁신적이며 개혁적인 위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 말을 세상의 말로만 알아들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훌륭한 사람으로 보기는 했는데 세상의 학문적으로 훌륭하게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거듭납니까? 거듭나는 게 뭡니까? 또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한다는 말입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육적인 이야기와 영적인 이야기를 듣는 방법

        육적인 이야기를 영적으로 듣거나, 영적인 이야기를 육적으로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되고 헷갈리게 됩니다.  
그 두 가지를 잘 이해하면 종교 안에서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저 말로 알아듣거나, 저 말을 이 말로 인식하면 방향이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집니다.  
영적(靈的)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심령적인 것을 말하고, 하나님에 대한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방법과 이상(理想)의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새롭고 훌륭한 얘기를 했는데 니고데모는 못 알아 들었습니다.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을 육신이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세상 똑똑이라도 하늘나라의 어린아이만큼도 똑똑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당시 굉장히 똑똑하고 말귀도 잘 알아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훌륭하고 큰 사람이라고 입을 모으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학문 꽤나 하고 종교에 도리 꽤나 하며 연구 꽤나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주님을 훌륭하게 보고 세상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위대한 선생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으로 알아들으니까 예수님께서 답답해하시며 다시 말씀을 반복해서 전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아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사람이 육(肉)으로 난 것은 육(肉), 영(靈)으로 난 것은 영(靈)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지상의 부모를 통해서 육으로 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은 하늘의 부모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영으로 난 것입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 사람, 영으로 난 것은 영사람입니다.  

 

육 사람과 영사람으로 구성된 인간

오늘 처음 온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만 해도 “기이하다.  참 이상하다” 고 할 것입니다만 사람에겐 육 사람과 영사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혼이라는 본체(本體)와 육신이라는 겉체 두 가지가 있어서 이 두 가지가 항상 존재하며 형상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물건이 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합해서 한 존재물로 되는 입장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이 있다는 것은 영이 있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육계만을 중심 합니다.  
그러므로 신령해야만 합니다.  
분명히 내적 존재세계가 있고, 외적 존재세계가 있습니다.  

바다도 내적세계와 외적세계가 있어 물 위에서 보는 세계와 물속에서 보는 세계가 전혀 다릅니다.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바닷물 속에 산도 있고 들도 있고 우리가 세상에서 보는 것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도 내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부모로부터 난 세계이고, 영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부모가 죽듯 죽습니다.  원 존재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신의 세계는 육계에서 부모를 통해 존재하다 부모가 늙으면 같이 늙고, 부모가 땅에 묻히면 자기도 얼마 후에 땅에 묻히고 이처럼 부모와 같이 움직입니다.  
우리의 영체 또한 영체를 낳으신  원 존재자(原 存在者)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늙지도 않으시고 죽지도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체 또한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물론 영계에서도 죽는 일이 있습니다.  

 

죽음의 의미

그러나 육계에서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의롭게 살다가 악하게 사는 경우, 이 때는 죽었다고 합니다.  
의에 세계에서 죽어나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의 삶은 영계에 가야만 이해할 수 있지 육계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영체는 하나님이 낳으시고, 우리 육체는 육신의 부모가 낳았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부모가 여러분을 낳을 때와 똑같이 우리 영체는 성부와 성령으로 영적세계에서 낳았습니다.  
우리의 영체는 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다만 빛 가운데 살다가 흑암 속에 묻히게 되었던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던 사람이 잘 안 듣게 되었다던가...  
이런 경우에 죽었다고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어떻게 죽었나?

아담도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으므로 죽었다고 본 것입니다.  
성경에 아담이 죽었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 후에도 계속해서 살았습니다.  
살기는 살았으되 죽은 삶이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육체도 괴롭고 영체도 괴롭게 인생을 살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보냈을 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다시 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후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5:45)
(고전 15:45, 개정)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세상에서도 보통 “죽었다”, “살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정치가 죽었다.” “젊은이의 사상이 죽었다” “교수들의 가르침이 죽었다”.... 이런 식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의 표현을 성경에도 많이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육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도 니고데모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었다는 의미는 다시 말해서 가치성을 상실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공산주의는 죽은 것입니다.  
생명력을 귀하게 보지 않고 자유를 무시하며 보다 사망권의 삶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1905년부터 1945년까지는 죽어서 지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나라도 애굽고역을 받던 400년 동안은 죽은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도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000년 동안 죽은 역사를 펴 왔지요.  죽었다는 표현을 그런 때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헷갈리고 있는 종교인들

니고데모가 헷갈린다고 했듯이 오늘날 종교인들도 헷갈린다고 합니다.  
헷갈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몸이 다시 부활된다고 문자대로 가르치니까 가르치는 본인조차 헷갈리고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깨달으면 이해가 안 되고 헷갈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사람들을 가르쳐 놓고도 끼리끼리 모이면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6,000년 동안 죽은 사람이 다시 산다고 하는데 사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겠냐?  참 궁금하다.  다 살려놓으면 수백억, 수천억 명은 될 텐데...  야, 신기한 일이야.  앞으로는 공중휴거해서 뿅뿅 모두 다 올라간다.  기이하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면서 니고데모처럼 의문을 던지고 기이하게 생각합니다.
“야, 이 사람아!  그냥 믿어버려!”

이와 같이 영적인 것을 육적으로 생각하면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영이 공중 휴거 되는 것인데 육이 공중 휴거 되어 돌아다니는 것으로 생각하니 그것이 얼마나 기이하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인 것을 영적으로 볼 때는 신기하고 기이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양이 멈췄다는 이야기를 풀어놓고 보니 기이한 것도 없고 신기한 것도 없지 않습니까?  
태양이 가거나 멈춘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 단축시킨 것을 멈췄다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상황과 영적인 상황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환각은 환각으로, 망상은 망상으로 끝나야지 그것을 육계로 돌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안되니까 환각 작용이라도 받으려고 술을 먹기도 하고, 본드 냄새도 맡아보고, 마약도 먹고 이상한 행동들을 합니다.  그것은 억지로 인생을 만드는 일이므로 육체만 망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영적인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하면 기적이나 억지 믿음을 강요하게 된다.

        니고데모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영적인 이야기를 육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영적인 이야기인데, 육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이상하고 기이하기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을 쓰고서 온 것이 이사야 11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새의 가지에서 한 싹이 나서 결실할 것이요 거기에 여호와의 신, 지혜 총명 모략 재능의 신이 강림하시리라” 했는데 그 신이 예수님께 강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역사한다는 말은 안 하고 어느 가문에 역사하고 강림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가문 전체에 강림한 것이 아니라 그중에 중심자인 예수님께 강림해서 역사를 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아무 이상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영적인 휴거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휴거를 시켰습니다.  영적인 휴거!  
오늘 본문 말씀과 연결시켜 말할진대 거듭난 생활, 거듭난 삶, 해탈하는 역사, 해탈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이것이 바로 휴거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은 그 시대에 휴거를 맛보고 휴거의 생활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했는데 이것을 육신으로 생각해서 육신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신비하고 기이합니까?  이해가 잘 안 가지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주님이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에게 한 것인데 베드로도 죽고 모든 제자들이 다 죽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또 오늘날 요한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육적인 부활을 외칩니다.  
(요 11:25,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래서 나는 ‘참 무식하다.  나 만큼은 빠져나와야 되겠다’ 하고 거기서 하늘 앞에 반론(反論)을 벌이면서 나왔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 했는데도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다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바로 그 육적인 삶이 영적인 삶이 되어서 생활 가운데 변혁과 생활 가운데 개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부활된 것이고 영원히 사는 세계로 연결되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육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단교회 목사들

그러나 오늘날 이단교회 목사님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한 주일에 누누이 몇 명씩 죽어가는데도 또 믿고 또 외칩니다.
“주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죽었냐?”
“앞으로 부활되어서 또 살아난다.  잠깐만 잠을 자는 것이다.  나중에 또 일어난다.  

앞으로 휴거 시키고 부활시키는 행사가 남아 있으니까 믿어도 괜찮다.”
이런 반론을 계속 벌려나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상황들을 분별해 주면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했습니다.
시대가 지나고 나니 더욱 그러함을 깨달을 수 있지 않습니까?  
시대가 그렇게 돌아갔는데 어떻게 부인(否認)을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의 근본은 영적인 세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영적인 세계입니다.  
거듭나는 것도 영적인 세계이고, 부활되는 것도 영적인 세계입니다.  바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새롭게 되어서 주님을 따라다녔던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했지만 그 시대에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산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영원히 산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물은 무엇이냐?   여기서 물은 양심을 말합니다.  

베드로 전서에 보면 물이 뭔가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라” (벧전 3:21)
물은 양심을 말한 것입니다.  
물로 거듭나라는 것은 양심적으로 거듭나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바로 영적인 거듭남을 말합니다.  
양심은 육에 해당하는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양심이 더 큽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을 다시 낳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받아들였으니 양심이 거듭나게 되고, 그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로 더불어 거듭납니다!  고욤나무를 참감나무로 접붙일 때 참감나무로 더불어 거듭남을 받게 됩니다.  사망권에 묻혔던 사람들이 생명권에 있는 예수님을 통해서 거듭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낸 자를 통해서 신앙이 다시 거듭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경제가 무너지고 인생이 전부 파멸되었는데 어떤 친구를 통해서 다시금 재기하게 되었다면 그로 인해서 거듭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에 있는 것은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늘나라는 공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 지구공중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거듭나는 것이 뭔지 알겠지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 선생이면서 이것을 모르냐?  네가 땅의 일도 모르는데 하늘의 일을 어떻게  믿겠냐?”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또, “하늘에서 내려온 자 외에는 모른다.  너희들이 나를 그렇게 모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 같이 나도 시대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겠구나. 살아서는 구세주 역할을 못해주고 죽어서 밖에 구세주 역할은 할 수가 없구나.  너는 죽어서 찾아올 수밖에 없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3:9-15) 그러나 믿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지요.

새로운 혁신을 일으키고 거듭나라!  부활돼라! 

오늘 핵심적인 말씀이 바로 뭔고 하니 혁신을 일으키라!  거듭나라! 이런 내용입니다.  
혁신적인 세계를 누가 일으키냐?  본인 것은 본인이 일으켜야 됩니다.  
본인이 혁신을 일으켜서 새 집을 지었는데 새 집을 지으라고 한다고 또 새 집을 때려 부수고 집을 지으면 되겠습니까?  새 집을 못 지은 사람은 혁신을 일으켜야 됩니다.
오늘 새로 온 사람들은 혁신을 일으켜야 됩니다.  

새로운 혁신을 일으키고 거듭나라!  부활돼라!  더 부활돼라! 더 새롭게 돼라! 더 새로움으로 창조해 나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제의 말씀을 주겠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알겠습니까?  물과 성령에 대해서 알지요?  물은 양심을 말한 다고 했습니다.  
물이 수평이듯이 양심은 수평이어야 합니다.   곧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물로 거듭나라는 것은 육적. 행실적. 정신적 혁신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것은 예수님으로 거듭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기  도 >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우리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대를 따라 계절을 따라 거듭나야 되고, 거듭난 생활과 변형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각각 혁신을 일으켜야 될 것이고, 시대를 따라가려면 혁신을 일으키지 않고 구조를 달리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했으니 그러함을 받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의와 사랑으로 개인적으로 거듭날 것이고 교회 단위로 거듭나고, 민족적으로 세계적으로 거듭날 수 있게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을 감사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각 무리에게 의와 사랑과 공의와 진리가 충만하고 영원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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