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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감동과 지혜가 가득한 설교 4 (풍부한 삶)

by 성경토크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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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지혜가 가득한 설교 4 (풍부한 삶)

 

(마 5:33-42, 개정)
 『[33]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오늘의 말씀은 마태복음 5장 38절 부터 42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을 중심해서 우리들의 삶을 다시금 훑어보면서 1년을 회상하며 그리고 어떤 삶의 자세가 부족했는지를 깨닫고 그 삶을 다시금 살아줘야겠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우쳐야 될 것입니다.  
본문의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해답입니다.

하나님은 1년 동안에 어떻게 우리에게 대해주셨냐 하면 그 역시 오늘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억지로라도 너희에게 풍성하게 대해줬노라”
지난 1년 동안 5리를 가고자 하는 우리에게 10리까지 동행해 주시는 그런 대함의 삶을 하나님께서 살아주셨습니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1년을 회상할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솟구치는 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과거의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 같은 삶을 혹은 구약시대 때의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할 때에 삶에서 이런 말씀의 주인이 됐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한 모든 사람에게 시대를 가르쳐 말씀해 주시고 그 시대를 교훈하시며 “내가 구약을 읽어 그 말씀을 보니까 모세 율법과 그 역사를 볼 때에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했는데 너희는 그 얘기를 들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네, 들었습니다.  성서적인 법령이지요”
“너희가 너희 가운데 서로 수모되는 일이 있어 서로 원수까지는 안가지만 적수 되는 데까지 가는 사건이 있으면 안 된다.  ‘상대가 너를 꼬집어 갔으면 너도 꼬집어 꺼버리고 오지 너희들이 무슨 백이 있다고 그냥 와서 하늘 앞에 매달리고 부당기고 하느냐?  하다 안되면 도피성으로 도망치던지.  너희 종들이 무슨 백이 있다고 내게 와서 얘기하느냐?  그저 한 번 때리거든 너도 한 번 때려주고 오지’ 이 말을 종들의 삶이 아니냐?”
구약시대의 삶은 종들이 움직이는 삶이었습니다.  
종들이 서로 싸워서 치고 받으면 “치고받고 끝내라” 하는 식으로 율법이 선포됐습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얘기를 너희는 들었느냐?”
“예, 들었습니다”
“나도 이 시대를 보고 성서의 입장을 너희에게 말하고 가는데 지금은 종들의 시대가 아니다.  나를 알고 따르는 너희들이 아니냐?  너희는 나의 삶을 표상으로 두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냐?  지금은 신약시대요 아들 된 입장인데 그 집의 종들이 아니고 그 집의 아들들이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서로 마구 싸우지 말라.  누구든지 오른빰을 치거든 왼빰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가지게 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라.  이것이 바로 형제끼리의 삶이 아니냐?”

        종들끼리의 삶은 치고 받고 하면서 “서로 싸워라.  그냥 싸우면서 살아라.  죽는 놈은 죽고 사는 놈은 살고.  많이 때렸으니 많이 맞다 죽던지..”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형제끼리의 삶,  인생의 참된 삶은 “서로 대적하지 말라.  서로 싸우지 말라” 는 삶입니다.  
이 말은 부모님의 “형제끼리는 서로 싸우는게 아니다.  형제끼리 서로 대적하면 되겠냐?”는 말이나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4,000년 동안의 구약은 종들의 시대입니다.

        구약은 종들의 시대였으나 신약은 예수님을 통해 아들적인 입장의 시대로 둔갑한 것이요 다시금 환생한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에 비해 다시금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휴거 됐다는 것이요,  변화됐다는 것이요,  부활됐다는 것이지요. 누구 때문에??  바로 예수님 때문에!!
그 마을에 놀음쟁이 하나 때문에 마을이 다 놀음판 마을이 되고,  충신자 하나 때문에 마을이 다 충신자의 마을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하나 때문에 모두 대우를 받게 됐고 굼벵이가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듯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 때는 아들들의 시대입니다.  
부모가 “형제끼리는 싸우는게 아니다”라고 말을 하면 자식들이 “엄마는,  안 싸우고 어떻게 살아?”하고 대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너는 그 전에 저 집에 가서 머슴살이를 할 때는 치구박구 싸웠었지.  그것을 어떻게 누가 말리냐?  그렇지만 지금은 머슴살이를 하는 때가 아니라 집에서 살만치 됐으니까 집에 있으면서 형제들끼리 같이 지내는데 싸우면 되겠어?  네가 네 동생하고 네 언니하고 네 오빠하고 싸우면 쓰겠냐?”

오늘의 본분 말씀도 이와 동일합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때 예수님께서도 “대적하지 말고 싸우지도 말라.  오른빰을 때리거든 왼빰도 돌려주고 서로 맞아주도록 하라.  네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도 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너 왜 이렇게 벗고 있냐?”고 물었더니 딸이 “언니가 결혼식장에 간다고 옷을 달라고 해서 다 벗어줬단 말이야”하면 어머니가 “그려?  내가 옷 사줄게”하고 시장에 가서 옷을 사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사줄 돈이 없으면 어머니 옷이라도 주던지.
“너는 이녀석아!  왜 그렇게 옷을 벗고 있냐?”
“형님께 옷을 빌려줬어요”
“옷을 다 줘?”
“속옷을 달라고 해서 겉옷까지 풍성하게 줬어요”
“아버지 옷이 있으니까 그놈 입고 다녀라.  그게 비싸지는 않지만 귀한 옷이다.  너로서는 아마 사 입을 수 없는 옷일 거야”
이와 같이 형제에게 주면 부모가 다시 그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장이 종들에게 “어서 일하러 가자”라고 하는데 종들이 “옷이 없어서 못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장이 “왜 옷이 없나?”하고 묻자 종이 “옆 사람이 옷이 없어서 줘버렸습니다”  하자 
주인장이 “저녀석,  저도 없는 것이 주고 있네.  빨리 뺏어 입어 이놈아!  빨리 일하러 가!  빨리 나와!” 그렇게 하지
 “아이고 옷이 없냐?  옷을 내가 사줘야지”  이렇게 안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겠습니까?

 
“누구든지 대적하지 말고 오른빰을 때리면 왼빰도 돌려 대주도록 하라.  형제끼리는 괜찮다.  
그렇게 하는 것을 부모가 보면 오히려 좋아한다.  
그러니 서로 때리고 맞고 잡아당기고 서로 싸우지 하지 말아라 속옷을 달라면 겉옷도 주고”
이것이  무슨 삶이냐?  
바로 풍성(豊盛)한 삶입니다.  

오늘의 주제 말씀처럼 풍성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풍성한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왜?  
형제(兄弟)이기 때문에 풍성한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는 거절하지 말라.”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우리가 형제로 복직되고 부활되고 모두 형제로 인연을 맺었습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복음으로! 어떻게? “내 복음서부터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삶은 적어도 이런 말씀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은 바로 한 형제입니다. 자매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내 형제요 자매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내가 선포했는데 그 말씀 뜻대로 사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니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때부터 형제라, 자매라 했지 구약에서는 형제, 자매 소리가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종들이라는 소리만 했지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습니다.

“모세야, 내 사랑하는 아들 모세야!”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여호수아가 싸움을 이기고 가나안 복지를 갈지라도 “내 사랑하는 여호수아야, 담대하구나. 너는 아름답다.” 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윗같은 위대한 왕일지라도 다윗에게 “아! 사랑하는 나의 아들 다윗아!” 하지 않았습니다.
“내 종 다윗아!” “내 종 모세야!” “내 종 여호수아야!” 했지 아무리 잘 믿어도 아들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그 집에서 충성해도 머슴은 머슴입니다.

여러분들은 머슴이라고 하면 잘 모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집에 타인은 타인이고, 식모는 식모고, 공순이는 공순이고 아무리 충성해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효자식일지라도 그 집의 호적에 딱 올라가 있습니다.
종은 ‘이 사람이 이렇게 충성하는데 몇 째 아들로 등록되었나?’ 하고 호적을 아무리 떠들어 보아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무리 충성을 안해도 그 집의 아들입니다.

종이 충성을 많이 했습니다.
불효자식하고 둘이 갔다 왔는데 주인이 불효자식은 앞에 앉혀 밥을 먹게 하고,
충성된 머슴에게는 “자네 가서 밥을 많이 먹게. 오늘 수고 많이 했어. 땀이 흘러서 몽땅 젖었네.” 하더라는 것입니다.
머슴은 자기가 충성했기에 주인과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상이 남아돌아가는데도 안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마만큼 종과 아들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이 어떻게 하여 주인과 한 자리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들 소리를 들을 수 있나?’ 하다가 결국 그 집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서야 “사위 자식도 내 자식이야.” 하며 밥을 같이 먹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고 시인(是認)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고 그의 생각과 주관대로, 그의 뜻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형제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볼 때나 죽은 자를 볼 때는 영안(靈眼)을 떠야 보입니다.  
그러나 산 성자(聖子), 산 메시아를 볼 때는 영안을 뜰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만 깨닫고 가면 자기가 눈을 감지 않는 이상 항상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을 안떠도 늘 볼 수 있는 사람, 늘 따라 하기 쉬운 사람, 같이 동행(同行)할 수 있고 같이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보내서 하나님의 사상과 뜻과 이념과 하나님의 목적을 전달시키는 것입니다.  
그와 일체될 때 형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종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풍부한 삶, 그야말로 풍성한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풍성한 삶을 사셨습니다.  꾀죄죄하게 야박하게 구두쇠 영감처럼 찌찌 한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지구촌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지역마다 그 나라마다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고 많이 왔다 갔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권(利權) 문제에 개입(介入)되어 있었습니다.  
일개 나라의 왕도 그러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들도 보십시요.  
땅을 사서 감춰대고 돈을 감춰대고 자기 이권을 위해 비리(非理)를 저지르고 사는 사람들, 오히려 부끄럽기 그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취에 빠지고 자기의 명예, 자기의 영광을 위해 금전을 끌고 가든지 금전을 끌고가지 않더라도 명예를 끌고 가든지 하면서 주어진 위치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눈에 띄었습니다.  
명예적인 것이 눈에 띄고 그 사람에 대한 권위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이 눈에 안 띄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소리도 안 하니까 눈에 띄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순수한 삶을 살아 나갔습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권위 주장을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잘 생겼어도 형제이기 때문에 권위 주장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권세 주장도 못하고 명예 주장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명예를 짊어지고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 명예를 주면 큰일 납니다.  구세주, 만왕의 왕의 명예를 주면 감당을 못합니다.  
아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지구촌의 왕을 세우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감당 못하니까.
        
구세주 외에는 만왕의 왕 자리를 감당 못합니다.  왜?  
그는 하나님의 신(神)을 자기 영인체로 삼고 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감당 못합니다.  
교만해서도 안됩니다.  그런 것이 금방 눈에 띕니다.  그래서 오직 그만이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 앞에 권한 대행(代行)을 할 수 없고 명예 대행을 할 수 없고 또 잘생긴 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잘 생겼는데 너는 왜 못생겼냐?” 하는 소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일체이기 때문에.  
자기가 낳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이 지구촌의 어느 누구도 그 자리의 사명을 감당 못합니다.  
그런 사명자가 아니고서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명예로 흘러버리고 물질로 흘러버리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에 보면 일반 교회의 목사만 되어도 돈을 슬슬 끌어서 갖다 쌓아놓고 뒤에서 이 짓 저 짓 다하고 돌아다니니까 야단법석이 납니다.  
어떤 목사는 한 30억을 쌓아 놓았다가 들통이 나서 그것 때문에 간사들이 400여 명이나 나와서 다른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기도원 같은 데도 보면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렇게도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사람들 앞에 양심선언을 하고 살았지만 80억이나 슬슬 끌어모아서 주식 사고 자기 개인 앞으로 돌렸다가 걸려 버렸습니다.  
밑의 사람이 한 40억이나 갖고 도망가고 그랬습니다.
        
이런 것을 볼진대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을 다 볼지라도 그런 사명을 감당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누구보다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왜 그런고 하니 생명 전체를 주관하는 분으로 오셨기 때문에 생명 하나만 살려줘도 못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부모 위의 부모가 되셨고 형제 위의 형제가 되셨고 애인 위의 애인이 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까?  
최소한 신약 역사의 말씀을 선포한 안에서 산다면 바로 신약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활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휴거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심판을 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어디 심판할 것이 있겠습니까?  
형제를 대적(對敵)하지 않고 오른뺨을 떄려도 왼편 뺨을 들이대고, 오리를 가자 하면 십 리까지도 가주고, 속옷 달라고 하면 겉옷도 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야, 인마.  왜 거죽까지 벗어줬어?  병신.” 그렇게 심판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잘하였도다.  정말로 너는 내 아들이구나.  정말로 형제를 형제로 봤구나.” 하실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인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직도 기성 시대에는 이런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삶을 못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이렇게 살기가 힘듭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9)

        이것은 물론 여러가지로 화나는 것을 참으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뺨만 돌려댄다고 해서 뜻이 이뤄지겠습니까?  맞는다고 해서 뜻이 이뤄지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너무너무 속상하고 화나게 했습니다.  
그러고서 A가 다시는 그런 짓을 안하겠다고 했는데 또 화나게 했습니다.  너무너무 미치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럴 때에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뺨을 돌려대기는 쉽습니다.  
몇 번 때리면 끝나는데 화났을 때 또 화나게 만드는 사람을 참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느 정도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고 싶으면 누구한테 물을 것도 없이 생활해 보면 압니다.  
자기 성격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하는 기계도 없습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자기가 충분히 생활해 가면서 어는 정도까지 사람이 되었나를 알아야 합니다.  
호랑이에서 양같은 사람으로 되었는가, 염소에서 양 같은 성품으로 변했는가는 생활해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 삶을 살아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손님들이 왔는데 부인이 밥상을 들고 오다가 부식을 떨어뜨려서 방바닥에 접시를 깨뜨려서 정말 화가 났습니다. 
 “손목아지가 삐었나?” 소리가 확 나오려고 하는데 ‘참아야지.’ 하고 참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밥을 다 먹고 상을 내가는데 이번에는 밥사발을 깨뜨렸습니다.  
그런 일을 참는 것이 뺨을 돌려대는 것보다 어려울 것입니다.
        
한 번 참는 것은 애굽에서 신광야로 온 것입니다.  
두 번 참는 것은 가나안 복지까지 온 것입니다.  
제 1차 구원뿐만 아니라 제2차 구원까지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런 식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할 짓 다하고 살면 성경을 이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금방 구원 받는다구요?  아이고, 그렇게 쉬우면 괜찮게요?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기의 모든 정신문제, 사상문제, 행동문제를 다 뜯어고쳐야 구원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왜 예수 믿고 구원을 못받고 그 모양 그 꼴들이 되었습니까?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 무섭습니다.  왜?  
예수만 믿었지 그런 것들이 안 고쳐졌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는 말씀과 같이 주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의인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이 행해 나갈 때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풍부하게 살아나가야 됩니다.  풍성한 삶!
5명 전도 한다고 해놓고 2명만 하면 안 됩니다.  5명, 10명까지 전도도 하며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두 그렇게 하면서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억지로는 5리, 마음내켜서는 또 5리를 가는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하는일은 억지로 할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감동되어서 하는 일은 억지가 아닙니다.  
감동, 감화되어서 움직여야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갑니다.  
풍부하게 해야 일이 잘풀려나간다는 것입니다.  
풍부하게 하지 않고서는 잘 풀려나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1년 동안 풍부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격, 감사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도 풍부하게 주셨고, 깊은 진리도 많이 깨우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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